Marche@

[책 한 그릇 vol.3 리뷰] <씨앗, 할머니의 비밀> 봄을 그려내는 토종씨앗 밥상

 

 

출점자들과 벗들이 많은 책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요리사와 농부 등 현장에서 자신의 손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이들이 풀어놓은 맛있는 이야기를 <시장에서 맛보는 책 한그릇>에 담아 갑니다. 지난 3월 그간 마르쉐@에서 씨앗이야기를 통해 만나온 여성학자 김신효정님과 마치 장을 발효하듯이 오래 묵혀 더욱 맛깔스러운 그녀의 책 <씨앗, 할머니의 비밀> 를 책 한 그릇에서 만나보았습니다.

 

 

이야기손님: 여성학자 김신효정

기획진행 : 이보은 마르쉐친구들 (언덕)


 

 

 

할머니들과의 만남, 그 경이로움

 

언덕: <씨앗, 할머니의 비밀> 책의 여는 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한국 사회의 급속한 근대화 개발 과정에서 씨앗도 할머니도 잊혀 갔다. 토종씨앗과 할머니의 경험과 지식은 낡고 쓸모없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곧 사라질 비밀이었다.” 곧 사라질 것들을 기록하려는 저자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지는 구절이었습니다. 농사와 자연에 대한 엄청난 경험과 지식을 지닌 전국 아홉 할머니를 가까이 만난 경험은 아주 특별했을 것 같아요.

 

효정: 할머니들을 만나며 경이로운 순간이 참 많았고, 다양한 힘을 배웠어요. 상주의 문달림 할머니는 정농회라는 최초의 유기농민생산자조직에서 70년대부터 유기농사를 지으셨는데, 그때는 녹색혁명, 통일벼의 시대로 박정희 정권에서 농업생산량을 강조하던 때였어요. 당시 마을의 농촌지도사가 매일 아침 할머니 논에 농약을 뿌리라는 뜻으로 빨간 깃발을 꽂고 갔다고 해요. 그러면 할머니는 새벽마다 그 깃발을 뽑으러 나가셔야 했어요. 약을 치면 안 되니까요. 할머니 부부가 상주로 귀농해서 원래 관행 농사를 지으셨대요. 그런데 농사지으며 약을 뿌리니 밭의 개구리며 미꾸라지가 모두 죽는 걸 보고 내가 이렇게 생명을 죽이는 농사를 지으려고 귀농했나, 고민하셨다고 해요. 거대한 운동이나 이념 때문이라기보다, 관행농사의 과정을 직접 경험 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농사가 뭘지 고민한 끝에 유기농업을 결심하신 거죠.

 

할머니는 수십년간 쌀값을 안올리고 주변 지인에게 직거래로 판매하세요. 어떻게 30년 넘게 쌀값을 안 올릴 수 있었냐고 여쭤보니 “내 주변사람들은 다 운동하고 가난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좋은 쌀 먹고 건강해야지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지 않겠어요?“라고 하셨어요. 보면 이 책에 나온 아홉 할머니들은 거의 자급자족 하시고, 자급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닌 거죠. 우리가 도시에서 살면 교통, 물, 전기, 먹거리.. 소비하지 않고는 하루도 생존이 불가능한데, 할머니들을 통해 이런 자급의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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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할머니를 만나다.

 

언덕: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79세이고, 다 합치면 711살이에요. 이 책에는 711년의 삶의 기록이 담겨있는 거죠. 그분들이 자급자족하며, 몸으로 겪어낸 현장의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할머니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효정: 개인적으로 페미니스트로서 일상에서 지속가능한 페미니즘과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언어는 뭘지 고민해왔어요. 그러면서 석사 논문을 ‘여성농민의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과 토착 지식’에 대해 쓴 게 이 책의 시작이고요. 결국 먹고 사는 게 해결되지 않으면 무엇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비와 생산의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한 대안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러다 우연히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토종 종자 지키기 운동을 알게 됐어요. 그 운동이 횡성여성농민회에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씨드림 네트워크’, ‘토종이 자란다’와 같은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으로 확장됐고요.

 

책에 나오는 또 다른 주인공인 이연수 할머니는 토종씨앗운동이 시작된 횡성에서 만나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인연이에요. 할머님은 학교도 못 다녔고 글자도 모르지만, 동네 분들이 궁금한 게 있으면 늘 할머니를 찾아요. 이건 어떻게 농사짓는지, 어떻게 요리하는지, 벌레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어떤 질문에도 할머니는 척척 답해주세요. 굉장한 농사 기술과 지혜가 있으신 거죠. 처음에는 제가 찾아갈 때마다 “결혼도 안하고 이런 일만 하냐, 애는 언제 낳냐”며 타박 주기도 하셨지만 차차 만남이 쌓이면서 “너랑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하는 농사일이 참 좋아졌다”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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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장, 고추찜, 메밀 범벅, 푸른독새기콩된장, 밤묵, 메옥수수칡떡, 수수망개떡, 메밀 조배기… 할머니들의 음식

 

언덕: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 효정 씨가 너무 부러웠어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먹거리가 이 책에 계절마다 무궁무진하게 나오는데 그걸 모두 맛보고 오셨으니까요. 오늘 여러분이 맛볼 함안 김순년 할머니의 밀장을 비롯해 고추찜, 메밀 범벅, 푸른독새기콩된장, 밤묵, 메옥수수칡떡, 수수만개떡, 메밀조배기미역국의 맛이 정말 궁금했어요. 산청의 임봉재 할머니 밥상을 보면 참나물, 미나리, 방아, 박하, 엄나무순, 두릅 등을 따서 온갖 효소로 본인만의 드레싱을 만들어 조물조물 무쳐내는 산나물생채라는 음식이 있는데,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도 이런 음식을 맛보긴 어려울 거예요.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너무 어렵고 고생스러운 일 같았어요. 할머니들에게 음식은 무엇일까요?

 

효정: 언젠가 할머니께 “무슨 음식 제일 좋아하세요?”라고 질문 드렸다가 바보같은 질문인 걸 깨달은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도시에 사니까 양식이든 일식이든 어플로 배달받거나 간단하게 나가서 외식할 수도 있지만, 농촌은 달라요. 바쁜 농번기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남이 해주는 음식이에요. 그만큼 여성에게 삼시 세끼 매일 밥상을 차려내는 일, 밥노동이란 정말 고역인 거죠. 할머니께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냐고 물었을 때 “난 그냥 다 좋아해” 라는 대답이 정답이었어요. 그때그때 나는 걸로 수월하게 해먹을 수 있는 밥상이 제일 맛있는 밥상인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의 밥상은 대부분 관계 속에서 차려져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보다 내 딸이 좋아하는 고추찜, 내 아들이 좋아하는 마늘장아찌에 대한 관심이 더 크죠. 할머니들은 돌봄 관계 속에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 음식 덕에 씨앗을 지켜올 수 있었어요. 저도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오로지 평점과 가성비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됐어요.

 

외계어만큼 낯설고 다양한 음식들이 책에 담겼는데, 사실 이 맛을 어떻게 글로 전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강원도의 이연수 할머니가 한번은 밤묵을 만들어주었는데, 밤묵은 뒷산에서 주운 토종 밤을 말려서 가루를 낸 후 가라앉혀 쑨 거예요. 저는 밤묵을 그때 처음 먹어봤어요. 이렇게 슈퍼에 가도 사 먹을 수 없고 유명 레스토랑에 가도 먹을 수 없는 굉장히 생소한 맛을 여러 번 만났지요. 오늘은 이 자리에서 밀장을 함께 맛볼 수 있어 더욱 뜻깊습니다.

 

 

 

 

밀장, 한번 빠지면 큰일 나는 맛

 

효정: 경남 함안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 다양한 밀장이 존재해요. 김순년 할머니의 밀장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지금까지 심어온 토종 호밀, 애밀을 수확해 담근 장이죠. 밀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메주처럼 보리껍질을 발효시킨 보리등겨를 넣는데, 매년 새로운 레시피로 담그세요. 한번은 옥수수 비율을 늘리기도 하고, 한번은 선물받은 와인을 넣기도 하고요. 밀장은 2개월만 숙성시켜 바로 먹고, 최대 2년 정도만 보관하며 그때그때 먹는 장이에요. 깊이 발효해 먹는 보통 된장과는 다르죠. 밀과 옥수수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짠맛보다 단맛이 강해요. 고추씨를 갈아넣어 조금 매콤한 맛도 나고요. 단맛과 매콤한맛, 고소한맛이 어우러져 한번 밀장을 맛보면 또 먹고싶어져요. 봄에는 들에 나는 풀을 밀장에 비벼서 비빔밥을 해먹고, 콩된장과 섞어서 찌개를 끓이기도 해요.

 

언덕: 토종 호밀과 겉보리를 발효시켜서 설탕이나 물엿 등 다른 가미는 안 했는데 달짝한 맛이 있어요. 함안에서는 밀장을 집장이라 부르고, 된장을 콩장이라고 불러요. 파종해서 곡식을 다 심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일일이 도리깨로 타작하고 키질해서 하루종일 삶아낸 밀을 짚 위에 부어 발효시키고, 말려서 가루를 내고, 보리는 도넛 모양으로 반죽해서 불에 굽고 짚으로 꼰 새끼줄에 매달아 숙성시켜 만들죠. 거기에 생 풋고추, 고춧가루, 소금, 옥수수가루 등을 같이 넣어 몇 달에 걸쳐 만들어지는 장이에요. 오늘은 효정 씨가 겉보리로 지은 밥도 직접 지어오셨고, 이 겉보리를 생산하신 서숙경 농부님도 이 자리에 함께 오셨어요.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서숙경 농부: 경북 고령에서 농사짓는 서숙경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금도 집에서 직접 조청을 고아 고추장도 담고 강정을 만드세요. 꼭 씨앗을 지키려고 하시는 것 같지는 않지만, 조청을 고을려면 엿기름이 필요해서 계속 보리를 직접 심어오셨지요. 저희도 같이 농사짓고 있고요.

 

언덕: 음식 문화가 남아있어야 씨앗이 지켜지지요. 그 문화를 지켜가는 분들이 이 할머니들이시고, 그런 의미에서 서숙경 농부님께도 겉보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할머니, 살아남은 씨앗의 비밀

 

언덕: 60년 동안 유기농사를 지어온 분도 계시고, 자가채종을 하시는 할머니 한분 한분이 엄청난 씨앗지킴이SeedSaver이자 생태 유기농업의 선구자예요. 또 모두 스스로 키운 농산물로 밥상을 차려내는 최고의 로커보어Locavore지요. 자신들이 돌보는 씨앗과 이 땅의 내일을 생각하며 머리띠 묶고 ‘아스팔트 농사’ 지으러 데모도 나가는 농민회 회원이기도 해요. 게다가 직접 농사지은 마로 길쌈해서 삼베옷도 짜시죠. 그걸 보며 농생태학에서 여성농민이 차지하는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정: 지금은 토종씨앗을 마르쉐 같은 곳에서 구하고 맛볼 수 있는데, 10년 전만 해도 토종은 굉장히 생소한 개념이었어요. 사실 토종씨앗운동의 시작은 GMO 때문이었고요. 2000년대 초반, GMO반대생명운동연대라는 시민사회조직에서 GMO를 해결할 방안을 고민할 때 토종씨앗이 대안으로 떠올랐고, 당시 스무명 남짓의 활동가들이 토종콩 씨앗을 얻어서 세 알씩 나눠갖고 심어봤대요. 그 안에는 유명한 환경단체, 농민단체 활동가도 있었는데 1년 뒤에 과연 몇 명이나 농사에 성공했을까요? 딱 한분이었어요. 그분이 당시 횡성여성농민회 한영미 회장인데, 비결을 물으니 옆집 할머니랑 같이 농사지었다고 해요. 콩 세 알을 심어 한 되, 600g을 지어오셨고요. 그 과정에서 여성농민회가 깨달은 거예요. 대안을 먼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부터 찾아야겠다고요. 그래서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씨앗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씨앗을 갖고있는 건 가장 가난한 농민이었어요. 소농일수록, 다양한 농산물을 조금씩 심어서 자급하며 생존해왔으니까요. 돈 되는 농사 지으려면 종묘회사에서 씨앗 받아다가 약이랑 비료 써서 크게 지어야 되고요. 소농들의 씨앗이 지금 보시는 다양한 토종씨앗으로 이어져온 거죠.

 

언덕: 할머니들처럼 개구리, 씨앗을 돌보며 농사 짓는 삶은 ‘효율’, ‘돈’이 만능인 사회적 흐름에는 정확히 역행하는 일이죠. 하지만 오래 이어져온 씨앗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 계셔서 지켜졌어요. 이 책의 제목이 <할머니, 살아남은 씨앗들의 비밀> 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도 할머니들의 개인사는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언어는 학문적인 언어로 정리된 적이 없었어요. 개인사로만 남아있던 것을 언어로 정리하는 어려운 작업을 효정 씨가 해주셨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효정: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절반 이상은 해외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먹고 있어요. 지금은 바이엘로 합병된 몬산토라는 회사가 전 세계 종자 주권의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먹는 청양고추, 토마토 모두 주권은 해외에 있죠. 그래서 지금은 대를 이어온 씨앗으로 농사짓는 행위가 무엇보다도 강한 투쟁이자 저항이 되었어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씨앗을 이어온 사람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깔끔하게 정리된 정책적인 언어, 유명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경제 발전 과정에서 의미 없는 존재로 다뤄왔던 여성 소농의 삶 속에서 가리워진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요. 그래서 여성농민 개개인의 씨앗, 먹거리, 밥상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질문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저도 많이 배웠지만, 할머니도 “내가 엄마로서, 희생자나 피해자로만 산 게 아니라 여성농민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확인하시는 것이 뜻깊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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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늘 내가 준 것보다 더 돌려준다

 

언덕: 반달콩, 삼동파, 준저리콩, 쉬나리팥, 몽당수수… 책에 보면 이렇게 예쁜 씨앗들이 많이 나와요. 할머니들이 이 씨앗을 정말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것이 느껴졌어요. 또, 할머니들이 “내가 씨앗을 보살폈다기보다는 씨앗 덕분에 내가 살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씨앗을 남기기 위해 힘들어도 농사지어 왔다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나고, “씨앗이 웬수” 같은 모성신화도 떠올랐어요. 할머니들과 씨앗은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효정: 어떤 씨앗은 처마 아래 매달아서 말리고, 어떤 씨앗은 장독 깊이 두는 등 씨앗을 보관하고 지키기 위해선 집안 구석구석에 손이 닿아야 해요. 결국 씨앗 관리가 가사노동과 연결되어 있기에 씨앗은 대개 여성농민의 손에서 이어져 왔어요. 씨앗을 돌보고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여성의 노동과 닿아있다는 이야기가 여성을 특정 성역할에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그것보다 하나 더 나아가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만 농사를 짓고 씨앗을 지켜온 것이 아니에요. 돌봄관계 속에서 씨앗과 할머니는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힘을 주고받았죠. 저는 그것을 생태돌봄이라고 봐요. 돌보는 행위 자체가 삶에 힘을 실어준(Empowerment) 거죠.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분이라면 이해하실 텐데, 생태돌봄관계에서는 돌보는 대상이 꼭 인간이거나 자식일 필요는 없어요. 생태적 관계, 특히 씨앗과의 돌봄관계는 다양할 수 있지요.

 

안동의 고갑연 할머니는 보라색, 노란색 색색으로 꽃을 피우는 콩꽃을 제일 좋아하시고, “씨앗은 자라는 모든 과정에서 늘 내가 준 것 이상을 돌려준다”고 말하셨어요. 작고 작은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자기 무게보다 무거운 흙을 뚫고 싹을 틔우죠. 우리는 씨앗을 흙에 심었을 뿐인데, 자라는 것은 오로지 씨앗의 힘으로 자라요. 사람과 씨앗의 관계를 단순히 모성 신화나 여성의 자연화로만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쓰면서도 할머니들이 살아낸 다양한 힘을 담고자 노력했고요. 앞으로도 생태돌봄에 있어서 여성을 자연화하는 대신 이 땅의 여성농민들이 그러했듯, 씨앗과 땅을 지키기 위해 실천하고 투쟁하는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자들에 관해 연구하고 싶어요. 이러한 생태적 실천과 투쟁이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해요.

 

 

 

 

 

지금 이곳에서 잇는 씨앗의 의미

 

언덕: 할머니들과 만나면서 효정 씨가 생각하는 토종씨앗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효정: 유전적으로 고유성을 가진 특정한 씨앗으로서 토종이 아니라, 이 땅에서 뿌리내리고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이어가는 씨앗으로서 토종에 주목하고 있어요. 사실 지금 토종씨앗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은 농촌진흥청의 종자은행이고, 거기에는 백년 전의 씨앗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현재 토양은 백년 전과 많이 다르죠. 지구온난화뿐만 아니라 산업화 이후 기후와 토양이 많이 변화했기에 백년 전 조선시대에 심었던 콩을 지금 이곳에 심으면 잘 자라지 않아요. 그래서 ‘토종이 자란다’ 모임이나 여성농민회는 토종의 오리지널리티를 세세하게 따지기 이전에 한국에서 토착화한 씨앗도 토종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죠. 옛부터 계속해서 이어온 씨앗들 못지않게 외래종이라도 이곳에서 토착화해서 이어가는 씨앗도 소중해요.

 

토종 이야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로컬의 덫’이에요. 토종이든 로컬이든 그 말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없어요. 토종과 로컬의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중요하죠. 2019년에 토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전히 GMO에 대한 대항이고, 마르쉐@ 같은 로컬 시장을 이야기하는 건 세계적인 농식품체계의 대안이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토종과 로컬의 개념은 계속해서 변해가는 것이고, 내부의 생산자, 소비자, 기업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행위성과 힘의 관계를 봐야 해요. 2019년,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왜 토종을 이야기하는지 계속 질문해야 해요. 왜 토종을 지켜야하는지, 어떻게 토종을 소비하고, 어떻게 더 많은 관계망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더 많은 질문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토종이냐 아니냐의 논쟁을 넘어 논의가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여기 도시와 괴리된 먼 이야기가 아님을 느끼고, 이 책을 통해 나의 일상과 연결되는 부분을 함께 고민해주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언덕: 관계 속에서 이어가는 씨앗이 단순히 토종이란 이름의 씨앗보다 더 귀한 씨앗이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그것이 오늘 마르쉐@의 ‘이어가는 씨앗’ 장터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책에 김종구 시인의 “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우리가 밥 한숟갈로 우주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가 차리는 밥상을 통해 할머니들의 우주를 느낄 수도 있고, 우리가 채운 장바구니를 통해서 마르쉐의 씨앗을 이어가는 농부들의 삶을 느낄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귀한 씨앗들을 품어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오늘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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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곧 사라질 비밀 같은 이야기

이 책은 토종씨앗과, 씨앗으로 차린 밥상을 지켜 온 아홉 할머니들의 비밀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우리의 씨앗과 할머니들을 서서히 망각해 왔다. 토종씨앗과 할머니의 지식과 경험은 돈이 되지 않는 낡고 쓸모없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곧 사라질 비밀이었다.

 

김신효정 페미니스트 연구자ㆍ활동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의 페미니즘으로서 에코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다양한 아시아여성학 연구 및 교육 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성평등한 발전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초국적 연대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가 있다. (출처 – 네이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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